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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병선생의 삶



추모가 '창살안의 꿈' - 이 곡은 선생의 후배이자 '암장'저자 중 한명인 황범주씨가 노래말을 만들고 선생의 후배이자 노래운동을 하는 이지상씨가 곡을 붙여 지난 17주기 추모제에서 처음 불리워졌다.

지금으로부터 25년전 '국제법학자협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대법은 판결일인 75년 4월 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결정하였다. 그 날 확정판결 이후 20여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이사건 연루자 8명을 전격적으로 '사법살인'에 처한 4월 9일은 당시 한국사회의 인권이 마지막 조종을 울리며 유신체제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던 정점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조작으로 점철된 이 사건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수병선배님! 그는 가장 엄혹한 시절 가장 강고한 조직을 준비하고자 했던 활동가의 삶을 살다 가셨다.

이수병선생의 생애는 철저히 조국과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성격을 지닌 4월혁명을 민족통일운동으로 전화되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당시 선생의 민족통일운동에 대한 기여는 실로 선구적인 것이었다. 학원민주화운동, 7.29총선시 혁신계후보지원, 계몽강연회 등 다각적인 활동과 접촉을 벌여 나가던 선생은 운동을 한단계 전진시키기 위하여 민족통일운동을 구상하고 실천하게 되었던 것이다. 60년 11월 12일 경희대 민족통일연구회를 발족시켜 수차에 걸쳐 세미나와 대강연회를 개최, 통일문제에 관한 인식을 넓혀 가는 한편 민통련(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의 전국조직 결성에 적극참여하였다. 선생의 민족통일운동의 구체적 방안으로서 우리가 익히 들은바 있는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였다. 서울대 민통련의 주요책임자들과 회동한 선생은 민족모순에 대한 관심을 일거에 제고시킬 수 있는 실천운동으로서 남북학생회담에 관한 견해를 제출하여 참석한 동지들의 동의를 받았다. 선생의 제안은 61년 5월 3일 민통련의 남북학생회담 개최를 결의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각종의 강연회, 후보지원 연설을 행하였지만 특히 기억에 남을 명연설은 61년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경찰추산 4만 인파가 몰린 가운데 개최되었던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학생대표로 행한 연설이었다. 선생은 '남북학생회담을 환영한다'는 연제로 열변을 터뜨려 청중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이날의 감동은 지금도 이어져 이때 연설에서 선생이 외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는 지금의 통일운동가들에 의해서 외쳐지고 있는 것이다.

5.16군사 쿠데타시 피검된 선생은 혁명 검찰부에 의해 학생으로서는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62년 실형 15년이 확정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다른 민통련과련자들이 형집행면제로 풀려난 반면 선생은 특 A급으로 분류되어 중형을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은 민통련 활동뿐만아니라 민자통, 민민청, 통민청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점, 민족일보 관련 사실등 대중선동가와 이론가로서 그의 잠재적 역량에 대한 군부파쇼의 평가 때문이었다.

선생의 옥중생활은 참으로 모범적인 것이었다. 그는 영어의 시간을 자기 수향의 기회로 이용하였을 뿐만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역량을 축적하는 시기로 설정하였던 것이었다. 병이든 혁신계 재소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당신의 일처럼 항의하여 징벌방에 수감된 정의감, 겸허한 자세, 교도관들이 감화될 정도의 품성, 학습의 정진 등은 모두 주위를 놀라게 한 일들이었다. 선생의 이러한 자세는 민족일보의 공채 당시에도 나타나는데 혁신적 기치를 내걸고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이었던 민족일보는 창간 당시 기자들을 모두 외부의 진보적인 인사들로 충원하였다. 공채는 한 번 실시되었는데 각 대학에서 몰린 지원자가 500명을 넘어섰으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유일하게 합격한 이가 바로 이수병선생이었다. 당시 조용수 사장이 출중한 능력을 인정하여 채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또한 이수병 선생의 올바른 지향과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사실인 것이다.

68년 4월 17일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선생은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변혁운동에 뜻을 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한 은밀한 접촉을 재개하게 된다. 독서회, 강좌를 통하여 혁신계를 비롯 학생, 노동자, 제 민주세력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활동을 전개해나가던 선생은 민청학련 상층부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사건으로 불법적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일년 동안 혹독한 고문과 협박으로 일관된 조작 수사를 받고 우리 곁을 떠나셨던 것이다.

선생의 죽음은 실로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선생께서는 웅대한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떠났지만 선생의 높은 뜻은 오히려 오늘에 와서 더욱 빛나고 있는 것이다. 수난과 저항으로 일관된 선생의 생애는 변혁운동선상의 젊음들에게 빛나는 귀감이 될 것이며 선생이 죽음으로 보위한 민족자주, 조국통일에의 의지는 더욱 확산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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