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학교 총민주동문회
HOME
로그인 | 회원가입
[    경희민동소개 | 민동사무국 | 민동특별사업부 | 열린마당    ]

도농교류사업

    도농교류게시판

    우리동문 농산물

신흥무관학교복원사업

    잊혀진 경희역사

    신흥무관학교 약사

    신흥무관학교 연혁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통신

    모교연혁복원게시판

경희학생운동사

이수병열사 추모사업

    추도사및 추도시

    추모사업회 약사

    이수병선생 연표

    이수병선생의 삶

    이수병평전 소개

    연론보도 내용


신흥무관학교 약사



● 1907년 항일비밀조직 신민회 결성

1907년 국내의 애국지사들이 항일비밀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했다.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자 신민회는 1910년 12월,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열며 국외 독립군기지 장소를 구체적으로 확정짓고, 대일 무장투쟁을 공식노선으로 채택했다. 즉 만주 서간도에 ‘신(新)영토’로서 토지를 구입하고, 여기에 무관학교를 세워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할 것을 최대의 사업으로 삼았다. 따라서 각 도 대표들은 지역으로 돌아가 서간도에 갈 이주민과 군자금을 모으기로 결의했다.

● 1910년 애국지사들의 망명

가장 먼저 우당 이회영 가문이 집단망명을 결의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예, 부귀영화도 버리고 모든 가산을 처분했다. 지금의 명동 YWCA 건물과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 일부가 이회영 일가가 살던 곳이다. 둘째 이석영의 재산 등을 포함해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650억원 (소값으로 환산) 내지 2,000억원(땅값으로 환산)의 거금이었다.
1910년 12월 30일, 우당의 일가가 한만(韓滿) 국경, 바로 압록강을 건너며 한국판 최초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또 이듬해인 1911년 2월, 이회영 가문에 뒤이어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유림과 지사들인 석주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과 그 가족들이 집단망명 했다.

● 1911년 자치기관 경학사 창립

1911년 서간도에 이주한 이회영, 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경학사의 조직과 신흥강습소의 설립이었다. 이들은 1911년 5월(음력 4월) 삼원포 대고산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조직이었다. 한편 경학사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보급하기도 했다.

●1911년 신흥강습소 설립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감격적인 신흥강습소의 개교식이 있었다. 토착민들과 일제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비록 평범한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지만, 신흥강습소는 신민회의 조직적 결의와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정체였다.
망명지사들이 서간도에 온 목적은 항일독립운동과 그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그것과 직결되는 사업이 바로 무관학교 설립이었다. 따라서 신흥강습소는 중등과정의 교육뿐만 아니라 군사과를 두어 처음부터 독립운동 전사들을 길러내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출발했다.


● 1912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1912년 봄부터 망명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912년 7월 20일(음력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 위치는 바로 합니하가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휘돌아 흘러 마치 해자(垓字: 성 밖으로 둘러 파인 강이나 연못)처럼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비로소 서간도 합니하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 1915년 쏘배차의 백서농장

신흥무관학교 교관들과 졸업생들은 통화현 쏘배차(백두산의 서편)에 군사기지인 백서농장을 만들었다. 1914년 가을부터 밀림 지역을 벌목하기 시작, 이듬 해 수천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군영을 완성했다. 백서농장은 중국 측을 의식하여 농장 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사실상의 군사기지나 다름없었다.
백서농장에서는 정예 병사를 기르기 위한 훈련에 주력하고, 농사일을 겸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채택했다. 만 4년 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혹독한 군사훈련과 극한 상황에서의 값진 경험은 이후 항일독립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 1919년 ‘독립군 전사 양성소’ 신흥무관학교

1919년에는 3 ․ 1독립시위운동의 영향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로 넘치자 합니하 지역의 무관학교 시설만으로는 학생들을 수용하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부근의 하동(河東) 대두자로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옮기고, 기존에 있던 합니하(哈泥河)의 학교를 분교로 삼았다. 이어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도 분교를 두어 모두 세 개의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9년 5월 3일, 임시로 빌린 양조장 건물에서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의 본교 개교식을 가지며 학교를 확장해나갔다.

● 1920년 청산리전쟁 참전

1919년 12월 북간도 지역의 군정부(정의단과 길림군정사의 연합체)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서로군정서(서간도의 군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북로군정서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파견했다. 이후 북로군정서의 핵심 직책을 맡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 10월 청산리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홍범대부대의 대한의용군으로 편성되어 청산리전쟁에 참전하였다.
이와 같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북로군정서의 지휘관이나 대한의용군의 일원으로 홍범도부대와 합류하여 청산리전쟁의 최전선에서 온 몸으로 전투를 치르며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1920년 신흥무관학교의 폐교

중국이나 일본은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일제는 1920년 5월부터 중일(中日) 합동수색을 시작으로 삼원포에서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했다. 또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홍범대부대에 대패한 일본군도 이를 복수하고자 양민학살과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앞당겼다. 따라서 서간도에서의 신흥무관학교 유지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1920년 6월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은 일시로 몸을 피하고, 이청천, 김동삼이 이끄는 400여 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가 청산리 전쟁에 참전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계승

1920년 이후 상해임정이 추진한 '외교독립'의 환상이 깨지면서 민족운동 역량이 강한 만주 지역이 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따라서 서간도 군정부도 1921년 5월, 본부를 길림성 액목현(현재 교하현)으로 옮겼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도 독판 이상룡과 부독판 여준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다시 전개하는 한편, 이들이 주체가 되어 액목현 대황지(현재 남강자)에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 검성중학원(劍成中學院)을 설립하였다.
이밖에도 길림성의 신흥촌에 신흥무관학교 분교를 세우거나, 3회 졸업생인 이규동은 길림성 영안현 신안촌에 신창학교(新昌學校)를 개설, 모교에서 배운 교과목과 교육이념 그리고 교가까지 신흥무관학교의 것을 따라 하며 신흥무관학교의 맥을 이어 나갔다

●해방 후 신흥무관학교의 부활

이시영(초대 부통령)은 해방이 되자 국내로 돌아와 신흥무관학교의 재건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미군정 아래서 미흡한 일제 청산과 민족정통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교육이 필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고 1947년 2월, 신흥무관학교의 교명(校名)을 그대로 이어받아 민족교육의 상징인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을 설립하였다.
이후 신흥전문학원은 1949년 2월 15일, 재단법인 성재학원 신흥대학(新興大學)으로 인가받고 1949년 7월과 1950년 5월에 각각 1 · 2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하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가산과 열정을 바쳤던 성재학원의 신흥대학은 한국전쟁이라는 혼란기에 경영난으로 1951년 5월 18일 조영식에게 인수되고, 1960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로 교명이 바뀌어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HOME Copyright ⓒ Since 2007~2011 All rights reserved.
130-872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 60-141 (4층) 경희총민주동문회    Tel 02) 960-5650     찾아오시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