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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홍익대의 감춰진 역사, 끝나지 않은 논쟁(상)

  <자료> 홍익대의 감춰진 역사, 끝나지 않은 논쟁(상)
  글쓴이 : 다물 조회수 : 1719   |   추천수 : 0   |   등록일 : 2012-12-11 11:39  

'단군 이념'으로 건립된 홍대, 박정희 흉상 바친 이유?

[발굴] 홍익대의 감춰진 역사, 끝나지 않은 논쟁 <上>

이대희 기자 

 

'청춘의 거리'에 
이름을 빌려준 홍익대를 상징하는 건 무엇일까. 왜 이 학교의 이름은 '홍익'으로 지어졌을까. 이 학교가 지금의 이미지를 가진 연원은 어디일까. 제 이름을 쓰는 불야성의 거리와 이 대학의 이미지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의 관계로 인해 다시금 조명되기 시작한 홍익대의 역사는 여러 의미에서 되돌아봄 직하다. (☞박정희 정권 강탈재산 환수 논의 : 민속촌과 홍익대, 정수장학회, 설악케이블카의 공통점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학교 설립에 큰 역할을 했고, 그 후 빨갱이 논란에 상처받았으며, 5.16 쿠데타 군부에 의해 학교가 무너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비리 혐의로 논란을 빚은 재단이 뉴스 장식했으며,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이 생존권을 걸고 투쟁을 벌인 학교이기도 하다.

홍익대의 오늘을 말하는 상징적 열쇠가 이 학교 연혁에 숨어 있다.

"본교는 1946년 4월 25일 재단법인 홍문대학관을 설립하고, 6월 27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31번지 소재 흥국사에서 개교하여, 동년 9월 22일에는 문과 및 법과 131명의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중략) 1947년- 운영난으로 '홍문대학관 관무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진을 대종교 관계인사들로 새로이 영입, 교명을 '홍익대학'으로 변경."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 이 학교 역사에 '대종교 관계 인사'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모든 역사의 시작은 해방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6년 귀국 후 대종교 지도자들이 서울시 중구 저동2가 7번지에서 찍은 기념사진. 이들은 1947년 원로회의에서 민족사학을 설립키로 했다. 오른쪽 상단 이흥수는 이 학교 초대 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홍익대학 설립자 유족회 제공

잊힌 역사, 민족 사학 홍익대

홍익대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대종교의 성격부터 알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한국국민이 중고교 시절 수업 시간에 간단히 듣고 넘어가는 이 종교는 1909년 나철에 의해 단군신앙을 중심으로 탄생했다.

이 종교는 항일 독립투쟁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겼다. 장세윤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일제 치하 대종교와 관련된 인물, 단체들은 사실상 종교 또는 종교인, 종교조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독립운동을 위한 종교와 그 관련 조직으로 인식하는 편이 더 나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나철, 김교헌, 윤세복을 비롯해 박은식, 김두봉, 김좌진, 박찬익, 서일, 신규식, 신백우, 신채호, 안희제,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황학수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대종교와 관련된 인물이다.

1915년 조선총독부의 '종교통제안'으로 인한 탄압을 피해 1917년 중국 지린성(吉林省)으로 총본사를 이전했던 대종교 인사들은 광복 후인 1946년, 서울로 돌아왔다. 환국 직후 이들이 가장 먼저 추진한 행동은 민족 사학 설립이었다. 1947년 5월 원로회의에서 이들은 단군의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이념을 바탕으로 재단법인 홍익학원과 홍익대학관을 설립하고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당대의 국어학자 정열모(1895~1968)를 학관장으로 선임했다.

곧이어 홍익학원은 1946년에 비인가 사설학교로 설립돼 분규를 치르고 있던 홍문대학관을 인수해 당시 대종교 본부였던 서울 중구 저동 2가 7번지 덕우사에서 첫 수업을 시작했다. 지금도 홍익대의 출발이 1946년이냐 1947년이냐를 두고 홍익대 측과 이흥수 유족 측이 다툼을 벌이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학교 측은 1946년을 홍익대의 출발로 보고 있다.

같은 해 7월, 종합대학으로 출발을 위해 홍익학원은 재단법인 홍익학원 설립준비위를 구성했다. 사재 1억 환을 기부한 이흥수(1896~1973)가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군산의 실업가로 알려져 있던 이흥수는 대종교 6대 총전교(總典敎, 교주)를 지냈던 인물이다.

이에 따라 1949년 6월 27일, 대한민국 정부 대학령 제1호 대학으로 홍익대는 4년제 홍익대학교로 인가받았다. 초대 이사장은 이흥수, 초대학장 정열모, 초대 재단 상무이사는 정일, 초대 사무처장은 김현묵이었다.

당시 재단의 재산은 상당했다. 강원도 홍천, 경기도 양평, 경기도 오산 등에 200여만 평의 토지를 갖고 있었다. 그 후에도 이흥수는 수년에 걸쳐 사재 15억 환에 이르는 자산을 학교에 더 투자했다. 서울시 남산동 교사, 서울시 누상동 교사, 서울시 문배동 교사,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 대지 14000평,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교지 8만 평, 서울시 중구 주자동 홍익버스 운수주식회사, 전라북도 전주시 홍익고무공업사, 경기도 인천 교사경기도 부천 영종도 염전 24만 평, 경기도 수원군 대룡면 토지, 전라북도 정읍 금광 등이 모두 이 학교 재단 재산이었다.

학교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설립 당시 홍익대의 중심은 문과대였다. 국어학과와 국사학과가 이 학교의 자랑이었다. 당시 학교의 설립 목표는 "민족정체성의 기본인 국학분야 인재를 양성하고 애국심 투철한 민족지도자를 기른다"는 것이었다.

빨갱이 사냥

학교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냉전이 찾아오면서부터였다. 홍익대의 중심인 민족주의 세력은 반공-공산주의 세력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1949년 김구 암살사건이 일어나면서 학교는 파도에 휩쓸리기 시작한다. 이 사건은 남한 내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냉전 구도 하에서 축출되기 시작했음을 상징했다. 이흥수의 손자 이준혁은 "전체민족진영에 대한 반민족세력의 쿠데타였다"고 강조했다.

김구의 운구를 홍익대 3기생들이 맡았던 사실은, 격랑에 휩쓸리는 한국사에 홍익대도 표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김구 서거 후 홍익대는 그가 설립했던 건국실천양성소를 인수하기로 하고, 이렇게 인수된 건국실천양성소의 교사에 지금의 홍대를 대표하는 미술과가 설립됐다. 건국실천양성소는 총 12기까지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알려져 있다.

1950년 1월, 보도연맹사건이 터졌다. 이사와 교수, 학생 54명이 철도경찰대, 헌병대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초대 학장 정열모는 빨갱이로 몰린 끝에 학장직에서 내려왔다. 곧이어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정열모를 비롯한 상당수 인물이 월북하거나 납북됐다. 남한에 남아있었다면 그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집단 학살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다. 반공 성향이 얕았던 홍익대의 지도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대종교의 민족주의적 지향은 서양문화에 기반을 두었고, 냉전의 지도자였던 이승만으로서는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며 "그것은 제3공화국의 박정희 정권에 와서도 바뀌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대신 이사직을 채운 건 검사였던 엄상섭 등이었다. 엄상섭은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학무국장을 지낸 인물이다. 독립운동가가 창설한 학교에 친일파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가 1951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던 홍익대는, 1954년 서울로 돌아와 이 해 12월 마포구 상수동 와우산에 본관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어려워진 재정 상황은 이 학교 미래에 암운을 드리웠다. 이 때, 재단을 찾은 이가 있었다. 1938년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해 1950년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냈던 충청도 출신의 이도영(1913~1973)이었다. 이도영은 1956년, 자신의 재산 10억 환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흥수는 이사로 재단에 남았고, 나머지 설립이사들은 전부 사퇴했다.

다물       2012-12-11 11:54
오랜만에 자료(2012.11월 프레시안 연재 기사) 하나를 편집해서 올립니다.
모교와 함께 해방 후 대종교 지도자들이 건립한 홍익대,
여기에도 박정희와 5.16 군사쿠데타 세력이 개입했지요.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이흥수 선생의 삶은 역사에 묻히고....
홍익대, 그 강탈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힘겹게 싸워온 홍익대 동문들에게 격려를 보냅니다.
까꿍       2012-12-11 12:03
이승만과 박정희! 정말 용서받지 못할 인간들이지요. 내가 죽기전 그 두 놈이 제대로 평가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소원입니다.
다물       2012-12-11 21:17
그 소원 꼭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홍익대는 청산리 봉오동대첩, 조선어 학회사건, 상해 임시정부수립의 주역이었던
송암 이흥수 선생이 자신의 모든 사재를 기부해 설립된 민족사학입니다.
하지만 1956년 친일파와 자유당 세력에 기반한 현 홍익대 재단이 치밀한 간교로
항일민족 사학 홍익대를 장악한 것입니다. 이후 박정희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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