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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홍익대의 감춰진 역사, 끝나지 않은 논쟁 (중)

  <자료> 홍익대의 감춰진 역사, 끝나지 않은 논쟁 (중)
  글쓴이 : 다물 조회수 : 2032   |   추천수 : 0   |   등록일 : 2012-12-11 11:41  

 

동맹휴업, 그리고 5.16

▲이흥수 홍익대 재단 초대 이사장. ⓒ홍익대학 설립자 유족회 제공
이도영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도영은 외려 족벌 체제를 강화하고 이흥수가 기부했던 재산을 팔아 사재를 쌓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반발은 거셌다. 1957년 7월, 동창회와 교수단, 학생을 중심으로 동맹휴업 사태가 발생했다. 같은 해 9월 25일에는 동창회가 이도영을 업무상 배임, 횡령, 사기, 사문서 위조 및 조세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되려 간첩으로 내몰려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홍대 간첩단 사건이 이것이다.

새 희망이 온 건 1960년 발발한 4.19 민주화 혁명이었다. 오랜 투쟁 끝에 1961년 3월 10일, 이도영이 물러나고 총동창회와 학생, 교수들이 이흥수를 다시 재단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이도영은 이사로 물러났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바로 5.16 군부 쿠데타가 발발했다.

군부는 이듬해 2월 2일, 미술학부만 남기고 나머지 학과는 모두 폐교 처분했다. 이어 문교부장관 김상협은 1962년 5월 30일, 이흥수 이사장을 비롯한 재단 이사들의 임원 취임인가를 취소하고 최문환 관선이사장을 선임했다. 이 시기는 바로 정부가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를 강탈하던 때이기도 하다.

인가 취소 사유는 간단했다. 이도영이 10억 환의 재산을 출연했음에도 "이를 감독하지 못하였으며, 이로부터 목적 사업경영에 전혀 경비 보조가 없이 학생공납금에만 의존경영"한다는 이유였다. 존재하지도 않은 돈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논리다.

이 조치의 의미는 이듬해 1963년 1월 15일 드러났다. 관선이사회는 이도영을 다시금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시켰다. 이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가 이도영의 종제로 알려진 이원영이다. 새 재단 이사로 들어온 이원영은 공화당 창설 당시 정책위 부의장이었고, 1967년에는 공화당 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원영은 일제 강점기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당시 "고이소 구니아키 (당시 조선) 총독의 진보적인 통찰력과 확고, 불굴의 신념에 운명을 맡긴 조선은 행복하다"고 찬양하는 등의 행위가 후일 드러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에 포함된 인물이다. 이도영과 함께 재단에 들어온 당시 이사 중 적잖은 이가 친일 논란에 휩싸인 전력이 있다.

군부의 힘으로 학교의 운영권을 쥐게 된 이도영은 이후 박정희 일가와 단단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우선 홍익재단은 군부 쿠데타의 핵심이었던 김종필에게 제1호 명예박사학위를 줬다. 이도영의 둘째 아들로 역시 홍익재단 이사를 지낸 이석훈은 육인수(육영수의 오빠)의 딸 육해화와 결혼했다. 육인수 또한 홍익재단 이사를 지냈다. 1966년 홍익대는 쿠데타 세력의 발상이었던 서울 영등포구 문래공원에 박정희의 흉상을 제작해 바쳤다.

이후 이도영은 군부의 핵심 정치조직이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하다 1973년 사망했다. 이도영 사망 직전, 재단을 빼앗긴 후에도 계속 민족운동을 이어오던 이흥수도 같은 해 5월 30일, 서울 대방동 상이용사촌 골방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2대 이사장은 이도영의 부인 최애경이었다. 최애경도 설립재단이 마련해둔 재산을 속속 처분하자, 1994년 다시금 족벌재단 퇴진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퇴진하는 최애경의 뒤를 이어 1997년 새 이사장으로 들어온 인물은, 이도영의 육촌동생 이면영이었다. 지금의 홍대는 이렇게 세워졌다.

역사가 바뀌었다

1968년에 나온 <홍익요람>에도 재단 이사장 이름에는 이흥수가 표기돼 있었다. 같은 해 열린 졸업식에서도 학교의 창립 연도는 1948년으로 기록돼 있었다. 1978년 발행된 교지에도 창설 30주년을 맞아 건립된 교시탑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도영과 이흥수가 사망한 후, 서서히 역사 지우기가 시작됐다. 1979년 발행된 자료에서 돌연 '설립자 이도영'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1983년엔 '도설 37년사'가 발행되는데, 여기서 갑자기 설립연도가 2년 앞당겨져 1946년으로 바뀐다. 홍문관 시절이 홍익대의 역사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홍익대의 창설자는 홍문관을 시작한 양대연이 됐다. 그리고 역사는 건너뛰어, 이도영 이사장이 들어온 1956년이 이어진다. '도설 37년사' 편찬을 주도한 이가 현재 홍익대 이사장인 이면영이다.

뒤바뀐 것은 역사만이 아니다. '홍익인간' 이념을 담아 정열모가 직접 작사했던 교가는 관련 내용이 삭제된 다른 노래로 바뀌었다. 1956년 편찬된 <학교연감>에 실린 당시 교가는 "백두산 앞뒤뜰에 퍼진 겨레는/ 오천년 뿌리박은 깨끗한 핏줄/ 빚어낸 불함문화 아름다우니/ 이상은 홍익인간 그 아니큰가/ 여명의 대한 땅에 샛별과 같이/ 숙명적 홍익대학 나타났도다"라는 가사로 구성돼 있다. 이 자료에는 '설립자 이흥수'라는 이름이 선명히 박혀 있기도 하다.

이도영 일가가 오랜 기간 집권하면서 처분한 재산도 문제다. 이도영 일가는 1957년 홍익운수공사, 홍익고무공업, 서울시 남산동 교지와 교사를 처분한 이래 수년에 걸쳐 학교 재산을 속속 팔아치웠다. 재단이 학교에 돈을 댄 게 아니라, 학교 재산을 재단 재산으로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당초 교사가 들어설 예정이었던 용산구 문배동, 마포구 염리동, 마포구 창전동 등의 교지가 모두 사라졌다. 당초 홍익재단은 서울시 곳곳에 홍익대학 캠퍼스를 세울 목표를 지녔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재산 처분 때문에 애초 8만 평 규모였던 상수동 부지는 현재 3만여 평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뒤바뀐 역사는 홍익대 사태가 세상에 알려진 2000년 초반까지도 고스란히 유지됐다. 당시까지도 설립자는 이도영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후 학교 측은 "관리자의 '개인적 실수'로 역사가 누락됐다"고 언론에 해명했으나, 여전히 학교의 출발은 1946년 홍문대학관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또 이흥수의 이름은 여전히 홈페이지에선 찾을 수 없다.

그간 이흥수 유족의 목소리는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현재 홍익대학설립자유족회를 이끄는 이준혁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할아버지(이흥수)가 살아 계셨다. 집으로 항일투사들이 놀러와 함께 사진을 찍은 기억도 난다"며 "할아버지 사망 후 가세가 기울었다"고 전했다. 이준혁 일가는 날림공사의 대표 사례로 불린 서울 마포구 와우아파트의 단칸방에서 월세로 지냈다. 이준혁은 중학교 졸업 후 고교에 진학하지 못하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합격했다.

그렇다면 이 역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세상에 알려졌을까. 학교는 이 논란에 어떻게 대응했으며, 어떤 입장일까. 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동씨       2012-12-11 13:10
이면영 총장?? 재직당시 청렴하다고 언론플레이 하고.. 동생도 당시 다녀서리 관심이 있엇는데 이런 비리가 있었다니..
아마 이면영 총장 누이동생이 사노련 운영위원장으로 체포되었던 오세철 연대교수 부인으로 세브란스에서 사망하자 의료사고 승소했던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물       2012-12-11 21:21
이면영은 현재 홍익대 이사장을 맡고 있지요....
얼마전 오세철 교수 칠순이었는데, 사돈지간이었는지는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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