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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결의 선언>과 민주공화제

  <대동단결의 선언>과 민주공화제
  글쓴이 : 주동욱 조회수 : 1538   |   추천수 : 0   |   등록일 : 2013-02-28 22:40  

    

   

    융희 황제가 삼보(토지, 인민, 정치)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동안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곧 신한국 최초의 날이다.

                           (하략)

 

 

1986년 8월 15일 각종 언론에 특종기사로 알려진 <대동단결의 선언(이하 선언)> 원문은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도산 안창호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1917년에 작성된 <선언>의 원문 발견은 독립운동계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 선언은 1910년 8월 29일에 있었던 순종의 주권포기는 단지 한 군주의 주권포기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주권 포기는 무효라고 제시되어 있다. 아울러 순종의 주권포기는 결과적으로 주권이 국민에게 상속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나와 있다. 즉 독립운동가들은 먼저 주권의 수수가 민족 내부에서만 이루어진다는 민족사의 불문율에 따라 이민족에게 주권 양여를 규정한 '합방'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경술 국치일을 황제가 주권을 포기함에 따라 주권이 2,000만 동포 전체에게 귀속된 '국민주권 선언의 날'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선언>은 대한제국의 영토·국민·주권을 승계한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첫걸음으로 한국 내 공화주의 담론이 나올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이 되었으며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화주의와 삼권분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선언>의 발기인은 신규식(신정), 조소앙(조용은), 신헌민, 박용만, 한진(한진교), 홍위, 박은식, 신채호, 윤세복, 조성환, 박기준, 신빈, 김성, 이일 등 14명이다. 즉 재미 인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대종교·동제사·신한혁명당의 관련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선언>의 작성자는 누구인가? 조소앙은 그의 회고록 <자전>에서 자신이 <선언>을 수초(手草) 했다고 한다.주1) 또 내용에 제 2인터내셔널의 민주사회주의적 표방이 엿보이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조소앙이 문건 작성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31세의 조소앙이 간사로 활약하면서 신규식 등 여러 선배들의 의사를 취합했을 가능성이 많다.

 

당시 국민주권설과 정부 수립 이론을 정립한 <선언>은 각처로 송달되어 주목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선언>에 대해 호응하고 찬동하기 보다는 대체적으로 관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원문을 갖고 있던 안창호의 경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는 안창호의 유품에서 원문이 발견되었기에 <선언>의 발기인이나 작성자로 안창호를 상정할 수 있지만, 그는 <선언>과 함께 보낸 찬동통지서를 보내지 않았다.주2)

 

<선언>의 실질적 지도자는 신규식과 박용만이었다. 신규식은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하고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1915년 이상설 중심의 신한혁명당에 가입하여 광무 황제를 옹립한 망명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한 경험이 있었다. 또 미주 지역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한 박용만은 일찍이 ‘무형정부론(無形政府論)’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1909년 미국의 한인 자치기관으로 조직된 대한인국민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는데, 이 조직은 노령·만주·멕시코 등지에도 지부를 갖고 있어 해외한인 전체를 대변하는 '무형(無形) 정부'의 역할을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각기 임시정부 수립운동 경험이 있던 두 사람은 임정수립 운동의 거두 이상설이 1917년 3월 작고하자 그의 유업을 계승하여 민족운동의 지도자 윤세복·박은식·신채호, 국제정세와 근대적 지식에 밝은 김규식·조소앙·신석우·한진교 등 14인과 함께 7월 상하이에서 '대동단결의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한편 당시는 중국 내에서 신한혁명당의 활동이 침체되고, 각 지역의 독립운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각개약진하고 있었다. 연해주의 권업회·대한광복군정부와 북간도의 간민회는 해체되었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는 백서농장에서 독립전쟁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단지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 국내의 대한광복회만이 비교적 큰 규모의 조직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형세 속에서 1917년의 <선언>은 독립운동의 방향에 고심하고 있던 각 단체들에게 활력소와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에 복벽적 망명정부가 아닌 임시정부의 수립 이론은 혁명적인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3·1운동 이후 국내외 각처에서 거의 동시에 임시정부가 등장한 것은, 즉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발표한 임시정부 수립 선언은 그만큼 각 지역에서 1917년에 발표된 <선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3·1혁명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1917년에 발표된 <선언>의 영향을 받아 그 내용을 각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한 결과인 것이다.

 

특히 '대동단결의 선언'의 임시정부 수립 제안은 1919년 4월 <선언> 주체들의 주도적 노력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으로 결실을 맺는다. 따라서 조동걸은 '대동단결의 선언''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주1) 김상구는 <범재 김규흥과 3.1혁명>에서 조소앙이 1917년 이전에 민주공화제에 대한 글을 발표한 적이 없어 <선언>의 문건 작성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면서 신해혁명을 통해 보황주의에서 공화주의로 거듭난 범재 김규흥이 동제사 회원들에게 일차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기반이 되어 <선언>이 나왔다고 본다.

 

*주2) 서중석은 3·1운동 이전인 1910년대에 안창호가 독립운동에 거리를 두고 있었다면서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즉 안창호는 독립투쟁보다 1913년 미국에서 결성한 흥사단을 중심으로 실력양성운동에 주력했다. 또 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미주 내 한인들의 독립운동 열기가 드높아지자 안창호는 흥사단우들에게 장문의 담화문을 보내 독립투쟁을 “턱없이 허망한 욕심이나 요행의 희망을 가지고 공상만 하려는 것”으로 보면서 실력양성이나 인격수양만을 강조했다고 한다.

 

 

 


주동욱       2013-02-28 22:56
몇 년 전에 써 놓았던 글을 간략히 편집해 올립니다.
<선언>이 1986년에 발견되어, 그 전에 한국근대사를 공부한 동문들은 '이게 뭐야' 할 것 입니다.
저도 계속 업 데이트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더군요.
특히 3.1혁명의 <기미독립선언>과 이후의 민주공화제 수립과 임시정부 수립에 영향을 끼친
<선언>은 오늘날 다시 주목할만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아리랑       2013-03-01 13:48
굉장히 중요한 글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이 민주공화제 수립을 목표로 내걸었다는 점, 우리의 민주화운동이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 등을 우리도 종종 잊곤 하지요. 좋은 자료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동욱       2013-03-01 15:14
1911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시 '대고산 노천군중회의'에서의 경학사 조직도
민주공화제와 관련해 주목할 만합니다.....
즉 명망가 몇 명만이 모여 단체를 조직하고 민중들에게 이를 따르라 한 것이 아니라,
다시 나라를 되찾을 때는 민주국가를 세워야겠다는 뜻으로
노천군중회의에서 민중들의 총의를 물어 경학사를 설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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