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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청산리 독립전쟁의 진실

  <펌> 청산리 독립전쟁의 진실
  글쓴이 : 다물 조회수 : 4655   |   추천수 : 0   |   등록일 : 2013-04-09 11:54  

 

1960년대에 카자흐의 한국어신문 주필 손세일이 ‘홍범도’ 연재소설을 그 신문에 게재했습니다
청산리 전투 내용은 고국의 라디오 드라마 방송 내용을 그대로 게재했습니다. 

정부에서 상해임정시절부터 줄곧 김좌진의 청산리 승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습니다

1960년대에 문무겸비의 위대한 장군인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을

다룬 라디오 드라마가  단파 방송을 통해 카자흐로 들어갔습니다.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 내용이 카자흐 신문에 게재되자 난리가 일어났습니다. 

그 전투 현장에 있었던 독립군 부대장, 부대원들이 나타나 항의했습니다. 

이에 손세일이 청산리전투 내용을 대폭 수정하여 발표했습니다. 

그로서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말하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래의 것은 청산리 전투 현장에 있었던 독립군 부대장, 부대원들의 

증언에 의거해 그 전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신흥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북로군정서는 신흥학교 학생 칠백 명을 골간으로 

구성한 부대였다. 그들은 독립군으로서는 유일하게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북로군정서는 총재 서일, 사령관 김좌진, 부대장 김규식, 이범석이었다.

서일이 원래 사령관으로  이청천을 골랐는데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할 수없이 김좌진을 임명했다.  ※김규식선생과 동명이인


김좌진은 원래 군사실무 경험이 없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북로군정서가 청산리에서 야영하다 
일본군에게 공격을 받아 오백여 명이 전사 내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것은 군정서 사령관에게 

전술적 상식이 있었으면, 초보적 군사지식이라도 있었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때 홍범도의 부대가 당도하지 않았으면 칠백 명 모두가 전멸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김좌진은 일본군에게 공격당하자 군모와 군도를 내던지고 맨 먼저 산 아래로 달아났다.

‘그가 산을 뛰어넘었다’는 소문은 그로부터 생긴 것이었다.

김좌진 부대를 궤멸시킨 일본군 사단이 홍범도 부대를 가운데 놓고 양편에서 공격했다. 

이 부대가 슬쩍 빠져나가자 일본군 같은 복장을 한 관계로 양편 사단이 서로 홍범도 부대로 

오인하고 싸웠다. 어찌나 치열하게 싸웠던지 육박전까지 벌였다. 그랬으니 

임정에서 발표한 사상자 일천이백 명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겠는가.

일제시대 독립군으로서 유일하게 부대다운 부대인 북로군정서가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해보고  와해되었다. 신흥학교에서 만난을 무릅쓰고 양성한 건아들을,

장차 독립군의 기간이 될 사람들을  허망하게 잃어버리매


서일 총재가 통분해 땅을 치며 통곡했다. 북쪽 러시아 땅에서 만주, 
연해주의 독립군들이 모여 부대를 재편성할 때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은 청산리 전투 때 
무능함이 드러난 관계로 소외되어버리자 슬그머니 부대를 빠져나가 만주로 돌아가 버렸다.

상해 임정이 김좌진 사백여명 부대가 일본군사단과 전투를 벌여 일천이백여 명을 사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의하면 김좌진이 일본군 대군을 격파했는데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조선민중이 청산리 전투 진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이 개 사단이 서로 싸워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의 간도 한국인 수천 명 학살은 그 화풀이였다.

청산리 전투는 임정에 최고의 선전 자료를  제공했다.


그러나 조선민중에게는 얻은 것은 적고 잃은 것은 많은 전투였다.


당시 이광수 등 국내 지식인들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고국에서 살 길이 없어 간도로 간 불쌍한 동포들이 청산리 독립군 때문에 떼죽음 당했다!”

상해 임정에서 김좌진이 청산리에서 일본군 대군을 격파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홍범도 부대가 슬쩍 빠져나가자 일본군 두 사단이 서로 싸워 죽었는데 손자병병, 제갈량 병법은 

원래 그런 것이다. 청산리 전투 때 한국독립군의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비록 일본군이 홍범도 때문에 자기편끼리 싸웠지만 그의 부대가 일본군과 비슷한 복장을 한 것, 

김좌진 부대를 구한 것 모두가 우연이었다. 동서고금 대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령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하는 일 없이 있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역사서에 그들이 전투를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했다. 

김좌진이 청산리에서 일본군 대군을 격파했다는 임정의 발표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카자흐로 이동한 조선민중들중 청산리,봉오동전투에 참가한분이 많았다고 합니다 

소련에 사셨던 분들의 시각이니 참조할만하기에 옮겨 온거임 ...


김좌진은 애국자이기는 하나 군사적으로는 무능한 인물로  청산리 전투 때

이렇다할 전적을 내지 못했다. 청산리 승첩은 홍범도가 이룩한 거라 보면 됩니다

일본군의 기록에는 봉오동 전투의 경우 1명 전사, 2명 부상으로 기록돼 있고 

청산리 전투는 전사 11명, 부상자 24명 축소해 보고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부 자료에는 일본군 전사자가 

봉오동 전투 120명, 청산리 전투 600명으로 파악했으며 이 역시 과장됐을 가능성이 높다

1920년대 “김좌진과 홍범도가 만주지역의 무장투쟁을 대표한다면

러시아에서는 김경천이 손꼽힌다”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경천 장군이 청산리 전투 결과를 

전달받고 일기에 “나는 우리 민족이 허언(虛言)을 좋아하며 실행이 
따르지 않는 인성이 있음을 한탄해 왔는데 지금의 소식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조선민중에게는 얻은 것은 적고 잃은 것은 많있다<자유시,간도참변 참조>


※ 고국에서 살길없어 간도간 동포들만 떼죽음 당했다 ?

(당시는 이광수는 친일파로 변절하지 않았음)
이부분은 글쓴이의 의도도 있으니 너무 흥분하지 마시길 ^^

※김좌진장군을 폄하하고자 는건 아닌데 청산리전투 빼고

그가 한 전투는 전혀없다...잘 생각해보시길 ...


임진란 7년 성웅 이순신이 다 싸웠고 만주 항일전쟁 김좌진장군이 다 싸웠다 ...?
먼가 역사가 진실되지 않코 누구를 위한 진실 왜곡이라면 ???



다물       2013-04-09 12:03
요즘 <광야에서> 개정 증보판을 더듬더듬 거리며 쓰고 있습니다....
새롭게 쓰다 보니 어려운 점이 하나 둘이 아니네요.
며칠 전 부터 '청산리 독립전쟁' 부분을 쓰고 있는데, 학계와 연구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네요.
청산리 전쟁은 신흥무관학교에서도 중요한 부분인데(광야에서 초판은 무려 30쪽)
슬쩍, 또는 애매하게, 적당히 넘어가기도 그렇고...오늘 여기서 꽉 막혀있습니다.
혹시 청산리 독립전쟁에 관심을 갖거나 연구하신 동문들, 제발 도와주세요!!!!
까꿍       2013-04-09 12:48
신흥무관학교는 원래 서로군정서에 속하지 않았나요? 윗글에 의하면, 왜, 북로군정서에 소속됐는지 궁금하네요. 김좌진은 원래 북로군정서 소속이 맞고요.. 청산리 전투를 시작할 시기에는 아직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따로 존재했던 것으로 알로 있는데.. 내가 잘못알고 있는 것인가?
다물       2013-04-09 13:49
위에 글은 퍼온 것이고요....내용은

1.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가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에
교관과 생도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해 수 명이 북로군정서로 가서 간부로 활약했고요.

2. 서로군정서 중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으로 구성된 교성대 400명을 이청천이 이끌고
백두산 자락에 있던 홍범대 연합부대와 합류해 무기를 받아 청산리전쟁에 참여했지요.

3.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김좌진과 홍범대 연합부대, 즉 양 진영에서 활약한 것은 사실인 데
김좌진이 지휘했다는 북로군정서의 전투 내용이 영~ 미심쩍은 데가 많아서.....

4. 역사적 진실은 하나인데,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활약이 분명한 것은 맞지만
청산리전쟁을 홍범대연합부대가 주도한 승전이냐, 아니면 조작된 김좌진의 허구적 신화에 가려
청산리전쟁의 진실이 여전히 왜곡되고 있느냐?가 고민입니다......
바람가르다       2013-04-09 15:28
이범석은 해방 후 뭐 했드라~~?
까꿍       2013-04-09 17:15
찾아보니 이범석이 승만이놈하고 매우 친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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