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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윤세주가 아니었다면 등소평은 죽고 없다

  <펌> 윤세주가 아니었다면 등소평은 죽고 없다
  글쓴이 : 다물 조회수 : 3849   |   추천수 : 0   |   등록일 : 2013-12-06 22:02  

윤세주가 아니었다면 등소평은 죽고 없다 

 

 

석정 윤세주 선생

 

항일투쟁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던 석정 윤세주의 모습과 그의 독보적 공적을 훗날 친구인 김원봉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 의열단 대표의 자격으로 다방으로 분주하면서 각종 문제에 대하여 접흡소통(接洽疏通)의 공작을 다하였고, 또 정확한 주장을 많이 발표하여 통일 성공에 대한 공헌이 컸다.” 이처럼 석정은 특유의 부지런함과 인내심, 논리적 대하술, 정확한 상황 판단과 민첩한 대응력 등을 발휘함으로써, 지난한 과제로만 여겨지던 전신통일과 조직봉합이 성취되게끔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실로 그는 1930년대 해외 혁명전선통일운동의 향도요 조타수요 견인차적 존재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명 소룡(小龍)·세수(世洙)·석정(石正:石井)·석생(石生)·석전(石田). 1919년 3·1운동 때 밀양 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동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9년 11월 지린[吉林]에서 결성된 의열단(義烈團)에 참가했다. 국내에 들어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일보사 중 한 곳의 파괴를 목표로 거사를 준비하다가 1920년 6월에 체포되어 7년형을 받았다. 1927년 2월 출옥 후 고향으로 내려가 그해 4월에 밀양청년회의 상무집행위원 겸 체육부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8년 7월에는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7년 12월 신간회 밀양지회가 조직되자 총무간사로 선임되었다. 신간회가 해체된 뒤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서, 1932년 10월 조선혁명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간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했고, 1934년 조선대일전선통일연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5년 조선대일전선통일연맹에 소속된 5개 단체가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하자, 당의 중앙위원으로 서기부에서 활동했다. 또한 한글판 기관지 〈민족혁명〉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했고, 또 다른 기관지 〈전도 前途〉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1937년 1월에는 청년운동위원회 주임이 되었고, 9월에 상하이[上海]에서 선전전에 참여했으며, 중국 중앙육군사관학교 성자분교(星子分校)에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사를 강의했다. 1938년 10월 창립된 조선의용대의 훈련주임과 한글판 기관지의 주임을 역임한 후, 1941년 봄 조선의용대가 북상항일(北上抗日)의 길에 오르자 1·3혼성지대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8월에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42년 6월 요현(遼縣) 마전(麻田) 십자령전투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전투중 사망했다. 중국을 개방개혁으로 이끈 등소평도 이 전투에 참여했는데, 윤세주부대로 인하여 죽음을 면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중국정부에서도 윤세주의 공로를 높이 사 묘비를 세워주었다.198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조선의용대 초기 주둔지인 마전 운두저촌(위)과 십자령 전투에서 사망한 윤세주의 묘소.

 

[2007/05/21 흑룡강신문]1942년 5월 화북의 일본군 주력은 팔로군 태항산근거지를 대규모적으로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팔로군의 백퇀대전에서 참패를 본 일본군은 항일근거지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중국을 정복하려는 저들의 야망을 실현할수 없다고 판단하였던것이다.

 

일본군 선두부대는 중국옷을 팔로군의 회색군복을 바꿔입고 근거지에 들어왔기때문에 백성들도 일본군대가 근거지에 들어온것을 미처 몰랐다. 교활한 적들은 선진적인 정보기술로 전화와 전보가 비교적 집중된 팔로군 전방사령부의 위치를 알아냈던것이다. 5월 22일 일본군 41사단 주력이 료현(辽县 지금의 좌권현)을 포위하였다.

 

팔로군 전방사령부 사령 팽덕회와 참모장 좌권, 정치부 주임 라서경(罗瑞卿)은 신속히 주력부대를 적의 포위권밖으로 전이시켰다. 그러나 지휘부는 미처 전이하지 못하여 포위해오는 적들과 격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팔로군 사령부와 북방국, 당학교, 신화일보사, 조선의용대를 비롯한 기관일군 수천명이 마전(麻田)부근의 남애포(南艾铺)에서 수만을 헤아리는 일본 정규군의 포위에 들었다. 팽덕회와 좌권은 분산돌파를 계획하고 좌권이 후위를 맡았다. 정치부산하에 있던 조선의용대는 라서경주임의 지휘를 받으며 포위돌파를 시도하였다. 사령부 수십명 경위원들이 서쪽고지에서 적을 저격하자 의용대 화북지대 박효삼대장은 대원들을 이끌고 동쪽고지에서 적들을 저격하였다. 이들이 필사적으로 적을 막고 싸울 때 비전투원들은 신속히 포위권을 뚫고나갔다. 적들은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이동하고있는 비전투원들을 폭격하였다. 부근의 십자령(十字岭)에서 진행된 치렬한 전투에서 팔로군 부총참모장 좌권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엄호를 맡고 혈전을 치르던 조선의용대는 밤 장막을 타서 무사히 포위권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부분적인 대원들이 흩어졌다. 조선의용대 주요간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는 일부 녀성대원들을 거느리고 화옥산을 빠져나가려 하였다.

 

27일 새벽 산속을 빠져나오던 이들은 적에게 발각되였다. 윤세주와 진광화, 최채는 녀성대원들을 엄호하기 위해 적을 유인하기로 결정하였다. 적을 유인하여 산아래로 달리던 진광화는 벼랑가에 다달았다. 그는 적탄을 맞고 벼랑에서 떨어져 장렬히 희생되였다. 산허리로 달리던 윤세주도 적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고 산우로 달린 최채는 동굴에 숨어서 무사할수 있었다. 적이 떠나간 다음 최채는 비통한 심정을 달래며 진광화와 윤세주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윤세주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탓으로 희생되였던것이다.

 

의열단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
설립연도 : 1919 
구분 : 무력독립운동 단체 
소재지 : 중국 만주 지린성 
설립목적 : 항일독립 
주요활동 : 일본고관 암살, 관공서 테러 

이들은 1920년대에 일본 고관(高官) 암살과 관공서 테러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는 급진적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1919년 3 ·1운동 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긴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필요에 따라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지린성에서 독립지사들은 민족주의 노선(路線)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抗日秘密結社)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이 이름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들이 미온적이고 온건하다고 본 의열단은 직접적 투쟁방법인 암살과 파괴 ·테러라는 과격한 방법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나기로 했다.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고문으로는 김대지(金大池) ·황상규(黃尙圭)가 맡았고, 단원으로는 김원봉(金元鳳) ·윤세주(尹世胄) ·이성우(李成宇) ·곽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鐘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권준(權俊)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공약 10조는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이와 같이 의열단은 조국독립을 위해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암살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수뇌 ·타이완총독 ·매국노 ·친일파거두 ·적탐(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지적하였다. 한편, 파괴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의 중요기관을 선정하고 이 시설에 대한 폭파를 의도했다. 이를 위해 의열단은 폭탄제조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초기 의열단의 의거활동으로는 ① 밀양 ·진영폭탄반입사건 ②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③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④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⑤ 상하이 황포탄 의거 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 ·효제동 의거 ⑦ 제2차 암살파괴계획 ⑧ 도쿄[東京] 니주바시[二重橋]폭탄투척 사건 ⑨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을 들 수 있다. 의열단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신채호(申采浩)는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주의(文化主義) ·외교론(外交論) ·준비론(準備論)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노선을 제시하였다.
 
신채호는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民衆革命)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던 것이다. 의열단은 독립운동에서 퍼져나가고 있던 사회주의 이론을 1926년부터 점차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변화는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창단 9주년기념 성명’에서 잘 나타난다.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순수한 민족주의 노선에서 계급적 입장까지도 고려한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1929년 12월 베이징[北京]에서는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는데,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급진좌파로 변신해갔다.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상하이[上海]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민족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김창숙(金昌淑) ·신채호 등이 실질상의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주동욱       2013-12-06 22:26
오늘 민주경희 11월 호에 사무국장이 쓴 조선의용군 후편 읽다가
석정 윤세주에 대한 글 한 편 쓰려했으나 시간 관계상 대신 퍼옵니다.....

올 여름 화북 지역 답사자들은 '조선민족혁명당의 불꽃' 윤세주를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라고 소개했지만
윤세주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냐, 아니냐는 아직 정설이 없습니다.
2000년대 초, 강만길 교수가 윤세주를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라고 했으나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때나, 신흥무관학교 명단에는 윤세주가 빠져있습니다.
또한 신흥무관기념사업회 측에서도 윤세주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 또는 수료 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적이 없고요......
저도 기록에 확신을 갖지 못해 신흥무관학교 책의 인명록에 윤세주를 넣지 않았습니다.
윤세주기념사업회 측에서는 윤세주 경력에 신흥무관학교를 언급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주동욱       2013-12-06 22:41
참고 삼아 소설 형식으로 쓴 <김원봉 평전>에서도
윤세주나 신흥무관학교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김원봉평전>에서는 김원봉, 양림, 김산이 신흥무관학교에서 형님, 아우 하며
함께 훈련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김원봉은 1919년 6월 경, 양림은 1919년 11월 경, 김산은 1920년 3월 이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3개월 간 훈련 뒤 속성으로 수료합니다.
즉 이들이 신흥무관학교에서 서로 만난 일이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소설의 경계가 어디까지냐 생각해볼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먼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윤세주는 이육사와 만남 등 연구할 부분이 많은 인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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