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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신흥무관학교 서울옛터 답사 자료(2부 순서)

  <자료> -신흥무관학교 서울옛터 답사 자료(2부 순서)
  글쓴이 : 주동욱 조회수 : 921   |   추천수 : 0   |   등록일 : 2010-06-05 13:11  
<각황사와 조계사> 여기 수송공원이 바로 해방 후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고자 설립된 신흥전문학원 터입니다. 즉 1946년부터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 지금의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의 선배들이 학업을 닦던 곳입니다. 당시 이시영 선생은 환국 후 곧 신흥무관학교 부활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조계사의 전신인 각황사 건물을 매입하여 학교를 세웁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각황사, 즉 지금의 조계사가 세워진 곳이기도 합니다. 흔히 조계사가 꽤 오래된 절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조계사는 올해 100주년을 맞습니다. 조선 5백여 년간 도성 4대문 안에는 절이 없었습니다. 또 1895년까지도 스님들은 도성 안으로 출입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해하시지요) 하지만 천주교, 개신교 등이 번성하자 뒤늦게 불자들이 돈을 모아 5백여 년 만에 이곳에 절을 세운 것이지요. 그 때가 바로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5월경이었습니다. 이후 각황사는 1938년에 태고사로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의 조계사 자리로 옮깁니다. 그 이유는 당시 일제 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이라는 것을 선포하여 모든 절을 일본 사원인 장충단에 있던 박문사 밑에 두려고 합니다. 그러자 이에 맞서 전국의 지주들이 31본산 주지회의를 열고, 총본산인 태고사 창건을 결의하며 불교계를 통합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일본사찰 양식으로 된 각황사를 이전하고, 그 대신 우리의 전통건축 양식인 정읍의 보천교(당시 민족종교인 증산교) 십일전을 옮겨 마침내 1938년 10월 25일 대웅전을 낙성합니다. 이어 북한산의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태로 1939년에 ‘태고사’로 결정해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습니다. 또 우여곡절 끝에 1940년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열린 본산주지회의에서 통합종단의 명칭을 ‘조선불교조계종’으로 확정하여 통합종단과 본산의 명칭으로 마침내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사태고사’로 확정됩니다. 통합종단의 명칭을 조계종, 총본사의 이름을 태고사로 채택한 이면에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준다는 것이었지만, 1941년의 조계종 창립은 일제의 전시총동원체제의 구축에 부응하기 위해 한국불교를 통합종단으로 묶어 전쟁에 총동원하려는 조선총독부의 고차원적인 술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 불교정화운동이 벌어지면서 비구 스님들이 태고사에 들어오면서 조계종의 이름으로 간판을 바꿉니다. 이후 태고사와 조계사라는 간판이 세력에 따라 바뀌면서 1970년대에 최종적으로 비구 스님들의 조계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한편 이곳 각황사 건물은 포교소로 사용하다가 해방 후에 신흥전문학원으로 바뀝니다. 즉 각황사 터는 근대 한국불교와 모교의 역사를 간직한 현장입니다. <보성사 터> 현재 연합통신과 조계사 사이인 보성사는 1905년에 보성전문학원과 함께 이용익이 세웠으나, 1907년에 이용익이 러시아로 망명하여 죽자 손자 이종호가 사실상 운영합니다. 하지만 천도교 손병희 선생이 재정난에 허덕이던 보성전문과 보성중학교를 1910년 말에 인수하면서 보성사의 운영권도 넘어갑니다. 천도교가 보성사를 인수한 이후에도 적자가 누적돼 폐쇄 직전까지 갔으나, 보성사가 민족을 위해 언젠가 큰일을 할 것이라 믿고 이종일 사장에게 운영을 계속 맡깁니다. 결국 보성사는 1919년 2월 27일 극비리에 2만1천부의 독립선언서를 찍어낸 역사의 현장이 됩니다. 또 3·1 만세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이종일 사장 등은 이곳에서 비밀리에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1만부나 발행합니다. 그러나 보성사는 일제경찰에 의해 즉각 폐쇄됐고, 그해 6월 28일 밤 일제의 방화에 의해 불타버립니다. 즉 일제는 소방대를 동원해 불을 끄는 척했으나 급수사정이 나쁘다는 구실로 인근 가옥에만 물을 뿌리고, 보성사의 전소를 방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현재 보성사의 표지석은 이곳에 세워져 있지만, 보성사는 조계사 내 홰나무가 있던 근처,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 위치쯤에 보성사 건물이 있었습니다. 즉 1919년 6월 화재로 보성사가 사라졌다면, 그 당시 각황사도 함께 불타서 사라졌을 테니까요. 이를 위해서 조계사는 법당과 홰나무 사이에 있던 보성사의 원래 위치를 알릴 수 있는 별도의 안내판을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수송공원의 조형물 위치가 3·1운동 당시 보성사가 위치했던 곳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3.1독립운동 준비과정의 숨은 주역-이종일> 호가 옥파인 이종일 선생은 충남 태안 출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며 언론계에서 활동합니다. 특히 1898년에는 순한글 신문인 「뎨국신문」을 창간하여 같은 시기에 조금 먼저 간행된 ≪황성신문≫이 소수의 한자 해독층을 대상으로 한 특수층의 신문이라 한다면, 이 신문은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글만을 사용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선생은 일단 국내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보성사의 사장으로 취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즘 말로, 3.1운동 당시 유인물을 인쇄하지요. 그 과정에서 일제의 조선인 형사 신철에게 발각되었으나, 당시 5,000원(쌀 1가마 5원 당시)로 입막음하고, 자신의 집으로 유인물을 옮기던 중 발각되기도 하였으나 족보라고 둘러대는 기지를 발휘하여 3.1운동의 33인으로 활약합니다. 한편 선생은 징역 3년을 받은 뒤 출옥하자마자 3.1독립만세운동 3주년이 되는 날(1922. 3. 1)을 기해 보성사 직원 50여명과 함께 거리로 나가 제2의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계획합니다. 하지만 그때 낭독할 제2독립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자주독립선언문을 인쇄하려고 했으나 일경에 발각됩니다. 이후 선생은 일제의 온갖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애국충정의 행동과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70평생을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모든 것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치다 1925년 8월 31일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초가의 거적위에서 68세를 일기로 영양실조 끝에 서거하고 맙니다. <각황사터와 신흥전문대학> “각황사 → 중앙포교소→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포교소→ 태고사→ 재단법인 성재학원→ 재단법인 숙명학원” 각황사 건물은 해방 후, 신흥전문학원이 1946년에 인수하여 학교로 사용합니다. 즉 성재 이시영 선생 등 신흥대학의 설립주체들이 1946년 3월(서류상 매입일자는 1949년 1월 1일), 당시 한국 근대 불교의 발상지로 지명도가 높던 각황사 옛터를 매입하여 신흥전문학원을 세웁니다. 한편 해방 후 40대가 넘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도 1947년 7월 19일 각황사에서 만나자는 신문광고(동아일보 1947년 7월 17일자)를 내고 오늘처럼 모임을 가집니다. 졸업생들은 각황사 옛터, 즉 신흥전문학원 자리에서 모임을 가짐으로써, 그해 2월 설립된 신흥전문학원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계승한 대학임을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이후에 학원은 1949년 2월 15일에 신흥대학으로 개편되고, 같은 해 3월 20일 정규대학으로 승격 인가를 받아 오늘날의 경희대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 신흥대학은 조영식에게 인수되고, 환도 후 이문동에 새로 신흥대학이 세워지면서 지금의 각황사 터의 학교 건물은 서류상 1955년 숙명여고에게 팔린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후 재단 이름도 성재학원에서 고황재단으로, 학교명도 1960년 4월에 신흥대학에서 경희대학교로 바뀝니다. 따라서 신흥전문학원이 매입한 수송동 82번지 바로 이곳, 각황사(태고사) 터는 우리 현대 불교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터이자, 해방 후 신흥무관학교의 항일 독립운동과 민족정기를 되살리고자 한 신흥전문학원이 세워진 곳으로 동문들에게 의미 있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조계사 100주년과 내년 신흥무관학교 100주년을 맞아 이 터의 역사도 재조명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민영환 동상과 자결터> 충정공 민영환. 그의 동상과, 묘와, 자결터와, 집터 등은 모두가 뿔뿔이 떨어져 있지만, 사실 이 동상이 더 문제입니다. 원래 이 동상은 안국동 로터리에 있다가, 도로확장 등으로 와룡동으로 이전되었다가 또 2003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집니다. 선생의 집터는 조계사 경내 동문 안 주차장 자리고, 인사동 한미은행 앞이 민영환 선생의 자결터로 그곳에 바로 기념물이 서 있습니다. (그곳은 조금 뒤에 들릴 것입니다) 민영환은 당시 권력의 실세였지요. 주미공사를 지내기도 하고,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즉위 60주년 축하식에도 참석하기도 할 정도로 벼슬살이를 합니다. 하지만 민영환은 을사늑약의 폐기를 궁궐 앞에서 주장하다가 일본 헌병의 강제해산으로 실패하자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에 청지기의 집에서 국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합니다. 그리고 순국 후 피 묻은 옷과 칼을 상청(喪廳)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의 문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바닥과 피 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血竹)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 나무를 절죽(節竹)이라 불렀답니다. <우정총국> 우정총국은 당시 해외를 시찰하고 돌아온 홍영식(洪英植)의 건의로 근대식 우편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고종 1884년에 조선시대 국립병원인 전의감을 다시 고쳐 청사로 쓴 곳입니다. 이곳은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건물이 완공되어 축하연이 열리는 것을 기회로 삼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장소로 더 유명하지요. 하지만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남에 따라 이 관청은 문을 닫고 당시 우정총국에서 찍은 5종의 우표는 사용되지 못합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이 건물은 세계의 우체국 중에서는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일제 때 일본인이 거주하고, 광복 후에도 개인주택으로 사용하면서 여러 건물이 모두 헐리고 1채만 남아 있었는데, 정보통신부에서 이 건물을 구입한 후 체신기념관으로 꾸미고 우편관계 자료를 전시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한편 우정총국 앞에는 우정총국 자리에 있던 도화서 터와 전의감 터의 표석도 있습니다. <도화서> 도화서의 도(圖)는 도해(圖解)나 도설(圖說)에 필요한 그림으로 관원들이 입는 복식, 왕실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나 그릇에 들어가는 그림을 말하며, 화(畵)는 왕실의 초상화와 같은 인물화, 산수, 화조 등의 회화를 뜻합니다. 조선 후기 영조 때는 도화서에 30명의 화원이 있었는데, 김홍도는 도화서를 통해 배출된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전의감>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왕족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은 의원의 진찰을 제때에 받을 수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대체로 병이 나도 웬만해서는 의료혜택은 받을 수 없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민간요법을 이용하여 치료하려고 노력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때 법으로 정해진 의료기관으로는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활인원(活人院) 등이 있었습니다. 내의원이 왕실 사람들의 치료를 위해 두었다면 바로 이곳 전의감은 대신들의 치료와 왕궁에서 쓸 의약 관리, 그리고 의약행정과 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지요. 혜민서는 일반 백성들의 진료를 위하여 설치한 기구였고, 활인원은 병자나 굶는 백성들을 보호, 치료하기 위해 운영한 곳이었습니다. <태화빌딩과 '삼일독립선언 유적지'> 이 석비가 밝히고 있는 이 터의 유래입니다. “이 집터는 본래 중종 때 순화공주의 궁터이다. 불행하게도 을사, 경술 두 조약 때 매국 대신들의 모의처로 사용되더니 3.1독립운동 때에는 그 조약을 무효화 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즉 기미년 3월1일 정오, 탑골 공원에서 터진 민족의 절규와 함께 민족대표 일동은 여기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알리는 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미리 서명해 두었던 선언서로 요로에 발표하였다. 민족대표 일동은 급히 달려온 일경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일제히 사로잡혔다. 그 뒤 감리교회는 이 터를 매수하여 태화 기독교회관 건물을 지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침략의 도구로 징발되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이를 되찾아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도시 재개발계획에 따라 건물이 헐리게 되매 새집을 짓고 여기에 그 사연을 줄잡아 둔다." 이 터는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순화궁이 되었다가, 순화궁이 1908년에 다른 곳으로 욺겨가면서 빈집으로 있었던 것을 이완용이 수리를 하여 별장을 만들고 친일파들의 교우처로 삼은 곳입니다. 그러다가 경술국치 후 어느 날 이 집 마당에 있던 커다란 고목나무에 벼락이 떨어진 사건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이완용 별장의 낙뢰 사건을 두고 말하기를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에게 하늘에서 내리는 천벌이다"라 하며 수군거리지요. 그래서 이완용이 낙뢰 사건 이후 이집을 팔려고 내놓았다고 합니다. 결국 이완용의 별장은 3.1운동 1년 전인 1918년, 마침 서울의 명물 요릿집 명월관이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기 때문에 명월관 주인이 이 집을 사서(임대했다는 설도 있지만) 명월관 분점을 만들고 옥호를 태화관이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에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곳입니다. 그리고 경찰에게 전화를 걸어 자진 체포됩니다. 백성들과 청년 학생들은 저곳 탑골공원에서 그 사실도 모른 채 목 메이게 이들을 기다렸지만....... 한편 당시의 건물은 1919년 5월 화재 사고로 소실되었는데, 6월에 발생한 보성사 화재 사건과 함께 일제의 방화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괘씸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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