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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우성 박용만선생 기념사업회 창립(2013.4.26)

  <펌> 우성 박용만선생 기념사업회 창립(2013.4.26)
  글쓴이 : 주동욱 조회수 : 3126   |   추천수 : 0   |   등록일 : 2013-04-30 11:38  

 

[단독]우성 박용만 선생 불꽃처럼 살다간 독립인생

창립선언문, 이승만 참모습 진실을 밝혀낼 것

 

김대용 기자 기사입력 2013/04/29 [17:44]
지난 26일 우성 박용만기념사업회가 창립했다. 창립선언문에서 오늘 우리는 조국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박용만 선생이 쓰러져가는 조국의 앞날과 비탄에 빠져있는 민족을 위해 구국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었던 역사적인 자리에 다시 모여 선생을 기억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우성 박용만기념사업회가 창립했다 ⓒ 신대한뉴스
이날 김원웅(전 국회외교통상위원장)3선 의원은 축사에서 박용만선생에 대한 연구는 재미동포들의 독립운동사에서 잃어버린 반쪽을 복원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밝혔다. 이어 이승만이 어떤 사람이었나? 사적이익을 위해 민족진영을 분열.약화 시켜온 역할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김 전의원은 이승만 맨얼굴이 해방이후 친일 반민족 결탁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이 드러난 것이다고 역설했다.

그는 남한의 기득권층이 된 친일반민족세력들이 왜 오늘날에도 이승만 미화작업에 공을 들이는지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창립 선언문에서 박용만 선생은 숙부 박희병 선생과 전덕기 목사가 이끌던 엡윗청년회의 임원으로 많은 상동파 애국지사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고, 후에 고국을 떠나 북미와 하와이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와 북경을 오가며 한 평생을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을 바쳤다. 1905년 미국에 도착하여 1909년 국운이 쇠퇴할 무렵, 박용만선생과 그의 동지들은 미주 네브라스카주에서 해외 최초로 독립군 장교 양성기관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우고, 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국민군단사관학교'를 창설하여 미주뿐만 아니라 해외 각지에서 조국광복을 염원하던 동포들에게 벅찬 감격과 희망을 안겨 주었다고 설명했다.

박용만 선생은 정치사상가와 언론인으로서도 눈부신 활동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호놀룰루의 <국민보>, 북경의 <대동>, 천진의 <혁신공보> 등의 주필을 맡아 수많은 논설과 저서를 통해 애국, 애족의 피끓는 심정이 담긴 절절한 글로써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민족의 치욕인 한일병탄이 일어나자 "이제 형질상의 '구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의 '신한국'은 바야흐로 울흥하기를 시작하니 어찌 희망이 깊지 아니함이요?"라는 글로 절망 속에서 오히려 희망을 발견했고, 곧이어 '무형정부론(無形政府論)'을 주창하며 독립운동의 선구자로서의 면모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들어선 1919년 보다 무려 8년이나 앞서 ‘가(假)정부’의 설립을 주장한 기념비적인 선언이었다고 강조했다.

'지명시(知命詩)’
大夢平生自覺知 평생 큰 꿈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丈夫胡爾等諸兒 장부가 어찌 어린 아이들 같을까
文非窮我終成器 글은 내게 궁하지 않으니 성공할 것이요
武則達人也得時 무술을 통달한 사람은 때를 얻을 때가 있다
重陸遠洋西誓 무거운 육지 먼 바다 서쪽으로 건너가 맹세하니
千兵萬馬東伐期 천병만마로 동쪽 치기를 기약한다
靑年失志何須恨 청년들이 뜻을 잃었으니 어찌 한탄 안하랴
月滿花開早或運 달이 차고 꽃이 피는 건 이르거나 늦거나 올 것이다

박용만 선생은 일찌감치 일평생 노정기(路程記)를 미리 써두었다. 의형제였던 이승만의 배반과 공격에도 일일이 맞서지 않았다. 오히려 박용만 선생은 ‘천병만마를 이끌고 동쪽을 정벌하러 나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며 중국대륙으로 건너가 독립전쟁의 계획을 세웠다. 박용만 선생에게 광복 사업은 일생이 아닌 영원한 목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역사 속엔 뛰어난 지도자들이 있다. 그리고 지도자와 수많은 민중들이 어울려 역사를 만든다. “백성들은 역사를 이어가는 실이고 지도자는 실을 감는 실패”다. 박용만 선생도 그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동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그 큰 뜻을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루나’의 채찍을 맞아가며, 또는 캄캄한 탄광에서 목숨을 걸고 노동을 하여 받은 소중한 돈을 쪼개어 독립금을 보내준 수많은 무명의 이민노동자들의 희생도 우린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그들이 진짜 우리 역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애국 청년들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던 ‘소년병학교’ 생도들의 군가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듯 쩡쩡 울린다. 우리는 피와 땀을 흘리며 구국을 위해 헌신했던 미주 한인 이주민들의 역사도 박용만 선생과 함께 기억하고자 한다. 그리고 승리와 영광의 역사와 함께 좌절과 실패의 역사도 함께 기억하고자 한다.

“우리는 결단코 청천백일을 쓰고 원수와 함께 살기를 꾀하지 말지라. 오호라! 가을바람이 소소함이여! 장사의 머리털이 관을 찌르도다.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함이여, 남은 회포가 끊기지 않도다.”(신한민보 1911.10.25.-박용만 논설 「果無荊軻一人乎 又無子房一人乎」)선생의 멈춰진 노래를 지금 우리는 다시 이어 부를 것이다. 우리의 청년 세대들이 항일 민족지도자 박용만 선생의 늠름했던 기상과 민족의식을, 조국 독립을 위해 꿈꿨던 원대한 꿈을 가슴으로 기억하여, 온 민족이 하나 된 통일 민주국가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작지만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우성 박용만 유족,후손들과 서대숙(하와이대 교수),김원웅(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장),한용원,최천택,윤경노 교수등 항일단체등 관계자가 참석했다.

又醒 朴容萬
우성 박용만(1881.07.02.~1928.10.17.), 그는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일본과 미국, 러시아와 중국을 넘나들며 일제에 의해 비탄에 젖어있던 우리 민족을 일으켜 세워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무장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 한글연구가, 그리고 언론인이었던 문무쌍전의 민족지도자였다.
대표적인 무장투쟁론자로만 알려진 박용만선생은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하고, 미국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한 개화 선각자로서 당시 혼란한 국제정세와 국내정세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났고, 그 결과 실질적인 무장투쟁만이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평생 무력항쟁의 길을 걷는다.
일찍이 구국의 뜻을 품고 고국을 떠나 1905년, 미국에 도착한 박용만선생은 1908년 콜로라도 덴버에서 해외동포대회(애국동지대표자대회)를 소집, 개최하였다. 그리고, 1909년 박용만은 최초의 해외 한인장교 양성교육기관인 ‘한인소년병학교’를 미국 본토 헤이스팅스지역 주정부의 허가를 받아 설립했고, 1914년에 5천여 명의 한인이 살고 있던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교민들의 가슴에 벅찬 감격과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 또한 박용만선생은 1911년부터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아 <조선의 기회가 오늘이냐 내일이냐>, <조선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무형한 국가를 먼저 설립할 일>, <정치적 조직에 대하여>등의 수많은 논설을 통해 한인들에게 ‘무형국가론’ 즉, ‘임시정부 설립의 필요성’을 알리며 설득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이루어 1912년 ‘대한인국민회’가 설립되었고, 이 대한인국민회는 북미와 하와이, 멕시코, 러시아, 중국 등 각지에 지부를 둔 실질적인 최초의 임시정부라고 볼 수 있다.
1919년 9월 상해에 통합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박용만선생은 초대 외무총장에 선출된다. 그러나 외교적 노선을 선택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아 그의 노선을 따르는 임시정부와는 뜻을 함께 할 수 없어 외무총장 자리를 사임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대한국민군을 조직하여 총참모에 취임하고, 1921년 북경으로 이동하여 신채호, 이회영, 신숙등과 함께 ‘북경 군사통일회의’를 결성한다. 이는 만주와 노령등지에 산재한 독립군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체계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919년 하와이를 떠난 이후 북경에서 주로 활동한 박용만선생은 안정적인 대규모의 한인자치지역과 독립군기지의 건설을 구상하며 범재 김규흥선생과 함께 <북경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 후 ‘석경산농장’, ‘대륙농간공사’등을 운영하며 독립군군사학교와 독립군기지개척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박용만선생은 수년전부터 계획된 일제의 이간책에 휘말린 한인들에 의해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비통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변절의 누명이 씌워진 선생의 죽음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퇴색된 채 묻히고, 잊혀졌다. 또한 한 때는 의형제의 연을 맺었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의 극렬한 대립관계는 해방이 된 이후에도 선생을 기억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내 일생에서 가장 힘겨웠던 상대는 나의 義弟, 又醒이었다.”
하야 이후, 하와이로 방명하기 전, 이화장에 잠시 머물던 이승만에게 그의 마지막 비서가 가장 힘겨웠던 정적이 누구였는지를 물었을 때의 이승만의 고백이었다. 모든 것을 잃은 후에 지나간 날을 회상하며 한 이 고백에서 한때는 義兄이었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義弟 박용만선생의 대립이 얼마나 치열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미주 3대 독립지도자로 손꼽히는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우열을 다투며 대립하고 협력하기도 했던 우남 이승만과 도산 안창호에 대한 관심에 비해 그 존재마저 희미해진 우성 박용만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지금 우리는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저서
「아미리가혁명」, 「군인수지」, 「국민개병설」, 「提倡我朝鮮文化之一二語」,
「조선말독본」
언론경력
신한민보(샌프란시스코),국민보(하와이),태평양시사(하와이),대동(북경),혁신공보(천진)
-주필역임.
1925년 태평양연안 국제신문기자대회 한국대표.



주동욱       2013-04-30 11:48
지난 4월 26일 상동교회에서 우성 박용만기념사업회가 출범했습니다.
박용만 선생과 동지분들의 후손, 서대숙 교수 등을 모시고 뚝딱.....
김민철(사학 81) 동문 등이 무척이나 애쓰셨고요.
미주와 북경에서의 대표적인 무장항쟁투쟁론자로, 신흥무관학교와도
맥을 같이한 박용만에 대한 관심이 있는 분의 참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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